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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지어먹는다는 것
작성자
김*수
등록일
2024.06.12
조회수
1,613

 요즘 나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가공되지 않은 식재료를 사서 끼니를 직접 만들어 챙겨 먹는 일이다. 앞서 '취미'라고 적은 이유는 절대 '특기'가 될 수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요리에 영 소질이 없었다. 날카로운 칼과 뜨거운 화구를 다룬다는 것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데, 엄마가 밥을 할 때 자꾸 옆에서 기웃기웃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라고 하셨다. 엄마 말이 맞았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드리는 길이다. 나는 커서 라면 물도 못 맞추고, 과일도 못 깎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친절하게 표시선이 있는 컵라면을 주로 먹게 되었고, 방울토마토나 귤 같이 칼로 껍질을 깎아내지 않아도 되는 과일만 먹게 되었다. 뭐든지 곧잘 해내는 내가 작아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주방 앞에서 낯가리는 사람이었다.

 요리를 시작하면 대다수가 거쳐 가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요리에서부터 복잡한 요리까지. 단순한 요리라 함은 라면, 계란프라이, 김치볶음밥 같이 최소한의 재료를 가지고 별다른 테크닉 없이도 완성할 수 있는 요리이다. 그렇다면 복잡한 요리란 무엇인가? 요리의 복잡성은 자율성에서 나온다. 재료를 내가 알아서 구성해야 할 때, 용량을 눈대중으로 맞추어야 할 때, 불을 자유자재로 조절해야 할 때 비로소 복잡하고도 어려운 요리가 된다. 초보는 '자박자박할 때까지 졸여라', '짭쪼름 할 정도로 간을 맞춰라' 같이 정해진 레시피가 아니라 본인의 감각을 토대로 조리해야 할 때 가장 난감해진다.

 레시피에 의존하지 않고 요리를 하게 되면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른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즉 나만의 방식으로 요리하는 건 '잘 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면책보험을 포기하는 일이다. 레시피대로 요리하면 분명 실패할 확률은 줄어든다. 하지만 정해진 용량을 맞추고 시간을 재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다. 직접 레시피 없이 요리를 해보니 내가 가진 재료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특별히 좋아하는 것을 추가하고, 중간 중간 맛보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참 재미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요리를 함께 먹을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즐거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하는 것은 또 다른 경지이다. 얼마 전 J가 일을 끝마치고 집에 왔을 때, 미리 저녁을 준비하면서 26년 치의 후회와 다짐을 한꺼번에 했다. 그리고 이 글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를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랑이다. 밥을 하는 동안 맛있게 먹을 네가 왜 이렇게 기다려지는지. 오늘 하루의 모든 고됨이 밥과 함께 꿀꺽 넘어가 소화되기를, 밥을 챙겨주는 누군가 있다는 것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렇게 꾹꾹 눌러 담았나보다. 고봉밥에 자꾸만 반찬을 얹어 주시던 할머니의 마음이 생각났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땀 흘려가며 백숙을 끓였던 엄마의 마음이 생각났다. 할머니도 엄마도 나를 많이 기다렸구나, 사랑했구나. 나 사랑 받았구나. 밥을 지어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숭고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내 반려자에게, 내 아이들에게 서툰 솜씨로 밥을 차려주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레시피대로 요리하는 사람을 '요리사', 또는 '셰프'라고 부르지 않는다. TV 프로그램만 봐도 일일이 레시피를 보면서 그대로 따라하는 요리사는 없다. '요리하는 사람'이 아닌 '요리사'가 되려면 본인의 방식대로, 본인의 메뉴를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되려면 본인의 방식대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우리는 무한히 넓은 우주 가운데, 무수히 긴 시간 속에서 작은 점처럼 유한한 생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회가 원하는 대로, 부모님의 바람대로, 동료의 기대대로 살기엔 이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편안함과 맞바꾼 자유 너머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쓰고 달고 짜고 신 오만가지 맛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감각들이 내 삶을 더욱 예민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오만가지 맛을 보고, 오만가지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걸로 됐다.

 밥 조금 해먹는 것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이냐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밥을 지어먹는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안부를 물을 때 으레 "밥 먹었니?"라며 끼니를 걱정한다. 만남을 기약할 때는 "밥 먹자."라고 한다. 심지어 가족을 '함께 밥 먹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식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밥 먹는 게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삶을 얼마나 관통하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세워놓은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고 실행하는 것은 훨씬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시간은 마냥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